1953년 유전정보가 네 가지 염기로 이뤄진 DNA에 들어있다는 발견이 있고 20여 년이 지나 염기서열을 해독하는 기술이 나왔다(다들 노벨상으로 이어졌다).
2000년대 들어 NT(나노기술)와 IT(정보기술)가 가세하면서 눈부시게 발전한 염기서열기술은 예전에는 꿈에서나 일어날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가장 유명한 예가 2010년 데니소바인의 발견이다.
시베리아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새끼손가락 뼈 시료(불과 30밀리그램)에서 추출한 DNA로 게놈을 해독해보니 네안데르탈인과 가까운(약 20만 년 전 갈라진 것으로 추정) 미지의 인류로 밝혀진 것이다.
데니소바인의 발견으로 현생인류는 네안데르탈인의 사촌에서 육촌으로 밀려났다(약 60만 년 전 갈라진 것으로 추정).
미생물 분야도 2000년대 들어 게놈해독기술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배지에서 배양할 수 있는 미생물만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메타유전체학(metagenomics) 연구가 가능해지면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다.
즉 대변이나 토양, 바닷물 같은 시료에서 바로 DNA를 추출해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미생물 DNA 염기를 분석한 뒤 생물정보학 기법으로 게놈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까지 전혀 존재를 알 수 없었던 많은 미생물의 실체가 밝혀졌다. 오늘날 장내미생물 연구가 꽃 핀 건 메타유전체학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핵세포의 기원을 찾아서
최근 게놈해독기술은 진핵세포의 기원을 밝히는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진핵세포는 대략 18억 년 전 원핵세포 두 개가 합쳐진 뒤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고세균(Archaea)이 진정세균(Bacteria)을 포획한 뒤 진정세균이 세포소기관인 미토콘드리아가 되고(세포내공생) 핵막이 형성돼 게놈을 격리하게 된 세포가 바로 진핵세포다.
그러나 최근까지 알려진 고세균 종류로는 고세균이 진정세포를 사로잡는 과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원핵세포는 세포벽이 있는 경직된 구조라 진핵세포처럼 모양을 바꿔 식세포작용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15년 학술지 ‘네이처’에는 스웨덴 웁살라대 연구자들이 수심 3283m 북극해의 해저 토양을 채취해 메타게놈(유전체)을 분석한 결과 기존의 알려진 고세균과 상당히 다른 고세균의 존재함을 밝힌 연구결과가 실렸다.
연구자들은 이 고세균을 위해 ‘로키아케오타Lokiarchaeota’라는 새로운 문(門, phylum)을 제안했다(분류단계인 ‘계문강목과속종’을 생각하면 새로운 문이 나온다는 건 드문 일이다).
메타게놈 데이터에서 확인한 로키아케오타는 세 종으로, 분류할 때 분자진화의 기준이 되는 리보솜RNA의 염기서열을 비교한 결과 로키아케오타는 다른 고세균보다 진핵생물과 더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한 종인 로키아케움 게놈에서 단백질 유전자는 5381개로 나타났는데, 3.3%인 175개가 지금까지 진핵생물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진 유전자와 비슷했다.
즉 이들 유전자는 진핵생물에 고유한 게 아니라 로키아케오타/진핵생물의 공통조상 때부터 갖고 있었던 것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이 유전자들 대다수는 진핵생물에서 세포골격과 세포의 형태변화에 관여한다.
원핵생물은 단단한 세포벽을 만들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진핵세포는 세포벽이 없지만 대신 세포내부에 액틴 같은 필라멘트 단백질로 이뤄진 ‘골격’이 있어 형태를 유지한다. 세포액도 물보다는 젤에 가까운 상태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지 경직된 세포벽 대신 유연한 세포내부골격을 지닌 원핵세포가 등장해야 훗날 세포소기관이 될 세균을 잡아먹는 일(식세포작용)이 가능할 텐데 지금까지 그런 원핵세포는 없었다.
그런데 로키아케움에서 액틴 유전자를 비롯해 세포내부골격과 식세포작용에 관여하는 단백질의 유전자들이 다수 발견된 것이다.
그 뒤 연구자들은 추가로 심해 일곱 곳에서 토양 시료를 채취해 메타게놈을 분석한 결과를 2017년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들은 논문에서 로키아케오타 말고도 진핵세포와 가까운 세 가지 문이 더 있고 이들을 합쳐 아스가드상문(Asgard superphylum(上門))으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수십억 염기쌍에 이르는 게놈을 해독했지만 데니소바인의 생김새는 전혀 알 수 없듯이, 메타유전체학 연구로 아스가드상문에 속하는 여러 고세균의 존재는 밝혀졌지만 배양이 안 되는 건 물론이고 해저토양 시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봐도 흔적조차 파악할 수 없다.
심지어 유전자의 산물인 단백질조차 아직까지 건진 게 하나도 없다.
따라서 유전자 염기서열비교로 이들 역시 세포골격에 관여하는 단백질을 지니고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아스가드 고세균의 세포에 정말 세포골격이 존재하는지는 증명하지 못한 상태다.
18억 년 전 갈라졌음에도 서로 인식해
‘네이처’ 10월 18일자에는 이들 단백질이 정말 세포골격과 관련된 기능을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연구결과가 실렸다.
싱가포르국립대 연구자들은 아스가드 고세균의 게놈 정보를 바탕으로 세포골격 형성에 관여하는 프로필린(profilin) 유전자를 재구성한 뒤 이를 대장균에 집어넣어 고세균의 프로필린 단백질을 생산하게 했다.
이렇게 얻은 아스가드 고세균 프로필린 단백질의 결정을 만든 뒤 X선 회절법으로 구조를 규명한 결과 3차원 구조가 사람의 프로필린과 꽤 비슷했다.
둘 사이 유전자의 서열은 꽤 차이가 난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결과다. 단순히 아미노산 서열이 비슷한 것보다 3차원 구조가 유사해야 같은 기능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진핵세포에서 프로필린 단백질은 액틴 단백질들이 서로 이어져 세포골격의 필라멘트를 이루는 과정에 관여한다. 만일 아스가드의 프로필린 단백질도 그런 기능을 한다면 진핵세포의 액틴에도 작용할지 모른다.
연구자들은 이를 알아보기 위해 아스가드의 프로필린 단백질과 토끼의 액틴 단백질이 같이 들어있는 용액에서 단백질 결정을 만들어 X선 회절법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아스가드의 프로필린 단백질과 토끼의 액틴 단백질이 서로 결합돼 있음을 확인했다.
고세균 아스가드와 진핵생물 토끼는 적어도 18억 년 전 공통조상에서 갈라졌음에도 단백질이 자기 파트너에 해당하는 상대의 단백질을 알아본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어떤 식인지는 모르지만 아스가드 고세균의 세포 내에서도 프로필린이 작용해 액틴 필라멘트가 만들어져 세포골격을 이루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어쩌면 아스가드는 진핵세포처럼 세포벽 없이 세포골격으로 형태를 유지하고 변형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이번 실험으로 진핵세포의 등장에 앞서 고세균이 진정세균을 포획해 세포소기관인 미토콘드리아로 변신시켜 공생하게 됐다는 가설이 한층 힘을 얻게 됐다.